다른 문화권의 공포 소설들이 은근히 덜 무서운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살갗에 불쾌하게 달라붙는 현실의 집요한 공포가 아니라, 한 다리 건너 보게 되는 남의 일이므로. 문자로 기록되어 현재까지 전해지는 여성 귀신들의 이야기는, 사실 그 기록의 주체들에게는 한 다리 건너 남의 일인 것들이 많았다. 이 이야기들은 당대의 여성들이 겪었던 범죄, 공포, 수난과 맞닿아 있었지만, 당대의 남성들에게는 귀신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훌륭한 사대부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졌다. 10p
→ 우리에게 전해지는 이야기들이 기록된 과정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억울하게 죽은 장화와 홍련은 왜 밤마다 사또를 찾는가.. 직접적인 복수를 하지 못하고, 사또를 찾아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을 호소하는 모습에서, 일찌감치 율령이 지방 곳곳에 뿌리내린 중앙집권적 사회상을 나타내는 것일수도 있으나, 동시에, 인외적인 존재가 되어서도 직접적인 복수를 하지 못하는 여성 권력의 취약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담대하고 공정한 목민관에 의해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준다(?)는 아랑류의 설화는 원귀의 한을 푸는데에 방점이 있지 않다. 지혜롭고 어진 목민관 남성 권력의 공정함과 배려심에 방점이 찍혀 있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새롭게 깨달은 지점이다.
2021년, 21세기가 시작되고도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성은 여전히 가정에서 차별받고, 사회의 유리천장에 짓눌려 있으며, 수많은 범죄의 피해자가 되고 있다. 전통적인 개념의 범죄뿐 아니라 기술의 발전에 따라 생겨난 새로운 범죄들까지 여성들의 안전과 목숨을 노리고 있다. 젠더사이드라 할만한 성감별 낙태로 태어나기도 전에 죽을 뻔했는데, 자라서는 나라와 사회를 위해 결혼하고 아이를 낳지 않는다고 비난을 받는다. 여성들은 앞으로 나아가는데 세상은 여전히 여성들에게 남성 가장과 두 아이가 있는 4인용 식탁에 앉으라고 강요한다. 그렇기 때문에 괴담 속 여성들은 여전히 슬퍼하고 괴로워 한다. 세상을 떠난 옛 여성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게 다가온다. 20~21p
여성이 범죄의 피해자가 되고 억울한 누명을 쓰거나 잘못된 소문으로 고통받는 것은 가해자의 잘못이지, 피해를 입은 여성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과거 여성들은 이런 억울한 일을 겪고 어디다 호소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과거에만 그랬을까. 현대에도 여성이 범죄의 피해자가 되면 사람들은 어두운 밤거리를 돌아다녀서, 외진 곳에 혼자 있어서, 옷을 단정하게 입지 않아서, 조심하지 않아서 그런 일을 당했다며, 범죄의 원인을 손쉽게 여성에게 돌려버린다. …(중략)… 그러니 여성들은 이런 귀신 이야기를 두고 자조하기도 한다. 귀신을 보고 놀라서 죽은 무능한 원님이나, 어떻게든 범인을 잡고 문제를 해결한 이야기 속 원님이 현실의 법원보다 나을거라고. 하지만 이와 같은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기록되던 당시에도 원님이 귀신의 억울함을 해결하는 이야기들은 온전히 피해자의 것이 될 수 없었다. 피해자인 여성이 아닌 사대부 남성들을 위해 기록되었으니까. 29~30p
애초에 이와 같은 필기•야담은 기록하는 사람도 사대부 남성이요, 읽는 사람도 공부하는 선비나 관리와 같은 사대부 남성들이었다. 이들은 현대의 독자들이 심심할 때 주인공이 남다른 능력과 운을 타고나 어려움을 손쉽게 돌파하는 이야기를 보는 것처럼, 뛰어난 사대부들의 무용담을 심심풀이 삼아 읽으며 자신을 동일시했을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죽은 여성의 억울한 사연은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기록자와 독자들이 자신과 동일시 할 수 있는 사대부 주인공은 원귀의 억울함을 손쉽게 해결해주었고, 원귀들은 이들 앞에 나타나 감사를 표한 뒤 사라진다. 마치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더는 거추장스럽게 굴지 않겠다는 것처럼. 33p
→ 앞서도 적었지만, 매우 흥미로운 분석이었다. 왜 여성 귀신들은 밤마다 사또를 찾아 민원을 넣을까.. 그리고 자신들의 문제가 해결되면 사또에게 보은하고 미련없이 떠난다. 아니, 원혼이 사또에게 보은을 할 필요가 있나? 그것은 목민관의 당연한 의무인데 말이다. 오히려 살아있을때 억울함을 풀어주지 못한 국가 시스템의 무능함을 비꼬아도 부족하지 않은가? 어쨌든, 한풀이를 했으니 이승을 떠나 더 좋은 세상으로 가는 것은 그렇다쳐도, 그들이 그렇게 희생될수밖에 없는 여성을 희생시키는 왜곡된 유교사회, 가부장 사회는 여전해서 또 다른 피해자들을 낳을것이다. 원귀가 되었음에도 유교적 가부장사회제도 안에서 자신의 한을 해결하는 여성 귀신들은 남성 권력 중심의 통치 이념을 옹호하기 위한 너무도 편리한 수단처럼 보이기도 한다.
성리학의 세계에 받아들여지지 못한 이들은 성리학의 질서 밖에 놓인 존재, 원귀가 된다. 죽어 귀신이 된 다음에야 이들은 비로소 자신을 둘러싼 성리학과 가부장제의 억압을 넘어, 국가의 권력, 즉 원님 앞에 모습을 드러내어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중략)… 즉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여성 원귀담은 여성으로 태어나 범죄의 피해자가 되어서도 쉬쉬할 수밖에 없는,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억압에서 벗어난 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들은 정말로 억압에서 벗어났을까? 43p
그러니 사실 여성 원귀들의 이야기는, 귀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원님의 이야기다. 원님들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귀신들을 정상성 안에 편입시키는 방식으로 그들을 평화롭게 내쫓은 뒤 현실을 복원하고 가부장적 세계의 평화를 되찾는다. 현실에서 약자들이 받는 억압은 바뀐 게 없고, 아버지는 처벌받지 않으며, 권력자인 원님은 명관이 된다. 이 얼마나 체제 수호적이면서도 당대의 사대부들에게 흥미진진한 이야기였을까. 45p
→ 정절을 의심당해 죽은 여성이 신임 사또에게 억울함을 호소해 그 한을 푼다는 아랑설화류에서 늘 의문을 갖게 된다. 그들이 계모로부터, 외부의 남성권력으로부터 모함당해 죽어갈때 그들을 지켜주어야 할 친아버지는 어디에, 무얼 하고 있었는가?
아랑의 아버지 밀양부사는 딸이 실종되었는데도, 딸을 찾기는 커녕 부끄러워하며 밀양 땅을 떠난다. 장화의 아버지 배좌수는 계모의 말만을 믿고, 장화를 외가로 보내는 것으로 딸의 살해에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이 여성귀신들의 죽음에 그들의 친부는 방관하는 것으로 일조를 한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단죄를 받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억울하게 딸을 잃은 불쌍한 아비로 둔갑하여, 악행을 저지른 계모가 처벌 된 후, 다시 후처를 얻어 자손을 보며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장화, 홍련의 다른 버전을 보면, 계모와 장쇠의 죽음 이후 새 장가를 든 배좌수는 장화와 홍련이 환생한 두 딸을 얻어 행복하게 살아간다. 아무것도 잃는 것 없이.)
원귀들은 문제 해결을 위해 자신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성리학적 가부장 사회의 모순을 일깨우지만, 문제 해결의 결과로 자신들 역시 그러한 성리학적 가부장제 사회의 정상적인 죽음의 형태로 들어가길 원한다. 그리고 원귀가 사라지면, 그러한 모순따위는 없었다는 듯, 다시 기존의 가부장적 질서가 세상을 지배한다. 물론, 이는 지금에서야 할수 있는 현대적인 비판의 시선이다. 하지만 당대라하여 이 문제에 대해 이상함을 느끼는 이들은 없었을까? 결국 이런 아랑설화류에서조차, 여성들의 피해는 온전한 목소리를 갖지 못한다. 아랑과 장화, 홍련이 죽음으로 갈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을 적극 보호해야 할 남성 보호자가 책임을 방기했기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흔히 말하는 여적여의 구도로 갈등을 축소 전가시키고, 자신들은 멋지고 의로운 모습만을 취사 선택한다. 당대의 사대부들에게 흥미진진하고, 급제한 자신을 동일시화 시킬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